마가복음 7장 9-13절

김진성
202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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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장 9절~13절 헌신

오늘은 여전도회 헌신예배. 일년 열두달 헌신예배를 드리는 전국의 수많은 교회들.

무언가 헌신이 필요한데, 지금 보다는 더 헌신해야 하는데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과연 헌신이 무엇일까? 

헌신: 몸을 바치는 것이다. 몸 바치면 어떻게 되는가? 몸을 바친다는 것은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다. 목숨 바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이미 다 바쳤다는 것이다. 

헌신은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의 궁극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껏 이해하는 헌신은 그런 것 아니었다. 

내가 상황이 허락할 때, 내가 설정한 한계안에서 잠깐씩 하나님께 나를 빌려 드리는 것.

그것을 헌신이라 해석해왔다. 과연 그것이 헌신일까?

오늘도 여전도회가 헌신예배를 드리니 그들이 어떻게 이 예배를 통해 결단하는 가를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아니면 이런 헌신예배는 행사이니 그냥 그렇게 강사 한번 와서 설교하고 가면 된다고 생각하실는지 모르겠다. 이런 모든 것은 헌신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 잠시 빌려 드리는 것이다.

* 매우 무섭게도 이 말은 우리가 여전히 우리들 자신의 것이라는 것이다. 


* 헌신은 그런 것 아니다. 헌신은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들만 바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어리석어서 우리 눈앞에서 누군가 그렇게 하기전까지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사람을 불신의 모습으로 볼 때가 많다. 

누군가가 교회일을 열심히 하면 항존직선거를 위한 사전포석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정말 그 사람이 항존직 선거를 위해서 미리 선거운동 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럴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항존직 선거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즉, 자기는 일할 때 그런 마음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말 하는 사람있으면 조심해야 한다. 


* 오늘 본문에는 헌신을 비웃는 또 한가지 모델이 등장한다. 

고르반이 바로 그것이다. 고르반이라는 말은 ‘ 예물’ ‘헌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들중에 누군가에게 주어야 하는 부담이 있는 물건이나 재물이 있을 때, 그것을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을 때 ‘고르반’이라고 말해 버리면 그 물건이나 재물의 상속은 교회가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은 아무도 그것을 손대지 못한다. 죽어서는 어차피 교회에 바치니 교회도 손해날 일이 없고, 자기도 살아생전 실컷 쓰니 아쉬울 것 없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식으로 부모님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기피했다. 자기재산을 ‘고르반’이라고 해 버리고, 부모님을 부양하지 않으며 자신이 실컷 쓰고 남머지를 교회가 상속하도록 한 것이다. 

재물만 그렇게 했겠는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가 이미 이런 식이었다.

부모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기피하고,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미명아래 가족을 돌보기를 기피하였던 것이다. 죽고 나면 그만이니 전혀 부담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고르반’이 아니다. 이런 삶은 헌신이 아니다. 

가정이 불화가 있어서, 배우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교회일에 더 몰입하게 되고, 사회생활이 더 어려워져서 교회일에 몰입하게 되고, 교회일에 몰입하게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못한다는 식의 삶은 하나님의 일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세상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헌신의 바른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교회를 이런 도피처로 사용한다. 


* 고르반을 악용하여 자신의 재산으로 부모에게 부양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하자.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신앙의 위력은 관계성의 개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가 생기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이전에 나를 알던 사람과의 관계도 다 회복되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면 그냥 예전으로 되돌아 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울이 회심한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경계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사울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 시작하면서 대적하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회복되었던 것이다. 

헌신하는 사람의 삶에는 이런 위력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헌신을 악용하는 삶, 헌신을 빙자하여 관계를 회복시켜야 할 사람으로부터 도피하는사람의 관계성은 회복되지 않는다. 헌신한다고 할수록 관계는 더 악화된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는 이유는 이 교회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이 교회안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러분이 밤이 맞도록 기도하는 동안 여러분의 가족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여러분으로 인해 상처받고 좌절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헌신은 실패이다. 

* 여러분이 이 공동체안에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 보다 더 일찍 나오고, 더 늦게까지 몸이 부서져라 일한다 하더라도 그 헌신이 동역자들을 지켜주고 세워주는 일이 되지 못하면 동역자들은 오히려 여러분을 보면서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 헌신은 실패이다. 

* 헌신은 관계성이다. 하나님께 드릴려면 부모님에게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앞에서 헌신하려면 여러분의 형제와 자매앞에서도 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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