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장 21-24절

김진성
202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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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장 21-24절 예수님을 찾는 인생 

2009년 강원도 홍천의 한 하천에서 한 아이가 물에 빠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 들었고, 힘겹게 아들을 구해내었지만 자신은 급류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를 발견한 주민들이 119에 신고를 하였고, 구조대가 와서 아버지를 시내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살아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남자 어른이면 급류에 빠진 사람을 구할때는 절대 몰에 뚜어 들어가서는 안된다라는 것 정도는 다 알고 있다.

실재로 수상구조상식에는 수상인명구조 강습을 받은 적이 없으면 물에 빠진 사람에게 직접접근하지 않는다가 첫 번째 수칙이다. 

부력이 있는 도구를 사용하여 간접구조를 하라는 것이다. 이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지만 자식이 물에 빠지면 사람은 사리판단을 하지 않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뛰어 드는 일부터 한다.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아이를 살리고 싶다는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 

이 아버지가 평소에 자기목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림일까? 전혀 아닐 것이다. 누구보다도 오래 살고 싶어 하고, 건강관리에도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지켜 오던 자기목숨이 중요하지 않다. 자식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절박함’이다. 

절박함은 모든 것을 바꾼다. 절박하면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도 서슴지않고 하게 된다.


어느날 한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런데 회당장이라는 인물은 예수님을 찾아 올 수 없는 인물, 찾아와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다. 

이스라엘은 딱 하나의 성전을 가지고 있다.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다. 그리고 이 성전에 1년에 세 번 모습을 보이고 나먼지는 모두 회당을 통해 신앙생활을 유지한다. 성전이 이스라엘의 신앙의 상징적 중심이라면 회당은 이스라엘 신앙의 실질적인 내용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역 마다 회당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다니는 교회의 모델이 바로 회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당에는 두 사람의 지도자가 있었는데 바로 ‘회당장’과 ‘랍비’이다. 

회당장은 회당의 전체 관리와 행정적인 대표였다. 랍비는 말씀을 전하고, 강론하는 등의 역할을 맡았다. 지금 개신교에서 담임목사는 랍비이고, 당회장은 회당장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는 한 사람에게 이것을 모두 맡겨두었지만 이스라엘은 나누어 놓았던 것이다. 

이 정도면 회당장이라는 인물이 그 지역에서 가지는 역할이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의 종교지도자는 현대사회속에서처럼 종교적 영역만 커버한 것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사회전반적인 것들에 대한 영향력이 있었다. 

이렇게 상당한 영향력과 지위를 가진 회당장이 공인되지 않은 지도자 예수님앞에 나타난 것이다. 

공인된 종교지도자 회당장이 전혀 공인되지 않은 나사렛 청년 예수님에게 나타나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의 사건일까? 

목회자가 교인에게 성경지식을 묻는 겪이다. 전문 요리사가 이웃집 청년에게 요리법을 묻는 격이다. 그렇게 하면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된다.

이 한번의 행동으로 회당장이 그동안 쌓아온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 다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앞으로 더 이상 회당에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당장은 예수님을 찾아왔다. 

이 당시 상황을 기록한 말씀은 이 본문 가운데 ‘큰 무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21절에도, 24절에도 큰 무리가 나온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회당장이 주님앞에 나오기를 주저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절박함 때문이다. 

회당장의 딸이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경을 헤매는 딸의 모습을 보는 아비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 것이 있겠는가. 회당장은 자신의 지위와 체면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절박한 마음이 있으면 사람은 무엇이든 하게 된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온 사람이 또 있었다. 

요한복음 3장 1절 이하에서 그 사람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니고데모였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지도자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산헤드린 공회원이 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국회의원인 격인데 단순히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정점에 올라야 유대지도자가 될 수 있기에 회당장처럼 사람들로부터 신앙적으로도 존경받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한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고, 또 주의 말씀을 듣고 실망하여 돌아갔다. 

무슨 차이일까? 절박함의 차이이다. 

주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절박한 마음이다.

밤중에 주님을 찾아 온 청년은 절박함 보다 자신의 현재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회당장은 자신의 모든 것 보다 딸이 더 중요했다. 이 차이는 실로 크다.


이렇게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앞에 나아오는 사람은 주님을 맞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와 함께 하신다. 

여러분은 회당장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니고데모의 마음으로 주님앞에 서 있는가. 

가장 먼저 이것이 선명해져야 한다.

만약 회당장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아직 여러분은 주님을 모시고 여러분이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회당장은 이렇게 주님앞에 나아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엎드렸기에 주님이 직접 그의 집을 향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부자청년 니고데모를 위하여는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으셨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에는 주님이 이루시는 역사가 기다리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인생에는 아무것도 없다.

주님을 만나기는 했는데 주님의 은혜는 경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생이 행복할 리가 없다. 본인은 신앙생활이라고 하는데 은혜는 없는 것이다. 

은혜없는 신앙생활이 이어지고 있다면 다시 한번 자문해 보시기 바란다. 

내가 회당장의 마음으로 주님앞에 나아왔는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포기할 마음으로, 전심으로 주님앞에 나아왔는가. 

이 문제를 먼저 선명하게 하시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이 얼마나 절박한 상태인지부터 깨달아야 한다.

회당장의 딸이 죽어가는 것처럼 여러분의 영이 죽어가고,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의 자녀가 영적으로 죽어가는 것을 깨달아야 이렇게 절박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앞에 나아와 엎드릴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여러분 인생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들을 더 늦기전에 깨달으시기 바란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가시는 중에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이다. 그녀는 바로 열두해 동안 하혈이 멈추지 않아서 바깥출입도 제대로 못하던 여인이었다. 

이런 여인이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곳에 나타나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이다. 

얼마나 절박하였으면 부정하다 손가락질 받던 여인이 거리에 나와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녔을까?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이런 절박함이 깨달아져야 한다. 

그래야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절박함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인생은 어떤 결과를 경험하게 될까?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길에 혈루증 걸린 여인을 만나고 시간은 지체 되었다.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지체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동하려는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와서 딸이 이미 죽었다고 알린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상황에서 회당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고 다시 회당장의 집을 향하여 가신다. 

가 보니 이미 딸은 죽어있고 사람들은 통곡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 무슨 헤궤한 말인가. 이미 죽은 딸을 보고 잔다니.

하지만 사실이었다. 

예수님에게 이 상황은 죽음이 아니라 자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가지고 놀던 블럭장난감이 부서지면 아이들은 좌절하며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흘린다. 하지만 아빠는 그것을 완벽하게 재현해낸다.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멋진 것으로 재탄생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마법사나 초능력자처럼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끝이 아닐 수 있다.

우리에게는 끝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는 인생이 경험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 없이는 끝나버린 인생이 사실은 전혀 끝이 아니라 자는 것처럼, 새로운 사건의 계기로 사용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제는 끝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영역들이 존재하는가? 

내 미래는 더 이상 소망이 없고, 나는 더 이상 청춘으로 살아갈 수 없고, 나는 더 이상 성공할 수 없고, 내 신앙에도 더 이상 새로운 봄이 찾아 올 수 없다.

상처뿐인 내 가족에게 회복의 기회는 더 이상 없고, 내가 이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을 만한 기회도 더 이상 없고, 내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도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채로 여러분의 현실을 바라 보니 그것이 끝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저 사람과는 이제 끝이다. 다시는 저 사람과 함께 이 교회안에서 동역하지 않는다.

다시는 그런 사역 맡지 않는다. 다시는 그런 봉사 하지 않을 것이다. 끝이다. 

여러분 혼자 그 상황을 바라 보니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처럼 상황이 종료되어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는 인생은 그렇지 않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종결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과정중에 있고, 새로운 기회를 위한 도구로 쓰임받는 중인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삶의 절박한 문제를 통하여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서 그 문제를 이렇게 해결받기를 원하신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으신가. 

모든 것이 끝나버린 인생, 더 이상 굳어져서 어찌 할 수도 없는 인생을 어쩔 수 없이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아직도 남은 인생의 진정한 후반전을 다시 시작하시겠는가?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을 다시 만나시기 바란다.

그리고 주님을 통해 인생에 새로운 의미를 시작하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평강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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